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일본원정 (문단 편집) == 명칭 == ||<-2> {{{#fff '''언어별 명칭'''}}} || || [[한국어]] || 원나라의 일본원정 || || [[중국어]]([[간체자]]) || [ruby(元日战争,ruby=yuánrìzhànzhēng)] || || [[중국어]]([[번체자]]) || [ruby(元日戰爭,ruby=ㄩㄢˊ ㄖˋ ㄓㄢˋ ㄓㄥ)] || || [[일본어]] || [ruby(元寇,ruby=げんこう)][br][ruby(文永,ruby=ぶんえい)]の[ruby(役,ruby=えき)][br][ruby(弘安,ruby=こうあん)]の[ruby(役,ruby=えき)][br][ruby(蒙古襲来,ruby=もうこしゅうらい)] || || [[몽골어]]([[몽골 문자]]) || ᠬᠤᠪᠢᠯᠠᠢ ᠬᠠᠭᠠᠨ ᠶᠠᠫᠣᠨ ᠢ ᠳᠠᠶᠢᠯᠠᠭᠰᠠᠨ ᠨᠢ || || [[몽골어]]([[키릴 문자]]) || Хубилай хаан Японыг дайлсан нь || 당시 [[원나라]]에서는 동(東)쪽을 정(征)벌한다 하여 '''정동'''이라는 말을 사용했다. 고려에 설치된 [[정동행성]] 역시 정동을 준비하기 위한 행성(行省, 파견 기구)라는 의미다. 일반적으로 [[1274년]]의 1차 원정과 [[1281년]] 2차 원정을 합쳐서 이야기하며, [[대한민국]]에서는 [[원나라]]([[몽골 제국]])의 [[일본]] 원정 혹은 고려군의 중요성과 고려의 자주성을 부각하여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라고 부르며 [[중국]]에서는 원군침일전쟁(元軍侵日戰爭), 즉 원나라의 일본 침략 전쟁이라고 부른다. 혹은 원일전쟁, 몽일전쟁이라고도 한다.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1274년의 원정을 분에이의 역(文永の役, 문영의 역), 1281년의 원정은 코안의 역(弘安の役, 홍안의 역)이라 부르며 이때 쳐들어온 여몽연합군을 [[원구]](元寇), 몽구(蒙寇)라고 부른다. 몽고 내지 몽골이라고는 하지만 이때면 원세조 [[쿠빌라이]]가 이미 [[베이징]]에 도읍을 잡고 나라 이름을 원(元), 연호를 중통으로 하고 중국 천자를 자처했을 때이며 몽골인들은 적은 숫자로 인해 잡병이 아닌 귀족뿐이어서 전원 고급 장수였고 하급 장수는 대개 북중국 [[한족]]들이고 잡병은 [[거란]]과 [[여진족]] 그리고 머릿수 많은 금나라 출신 한족들이었다. 고려인은 주로 외인부대였다. 당장 고려 침공 때도 잡병 대부분이 거란/여진인과 한족이었다. [[임진왜란]], [[병자호란]] 등의 역사 용어에 비추어 볼 때 '원나라의 일본원정'이나 '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'이라는 단어는 선전과 침공 사실을 대칭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.[* 특히 일본을 낮추어 부르는 '왜'가 아니라 '일본'이라는 어휘를 선택한 것도 주의할 만하다. 사실 '일본'이라는 국호 자체는 훨씬 이전인 8세기에 정립되었지만, 중국과 한반도 국가들은 자신들이 처한 외교적 상황 및 대의명분에 따라 왜와 일본의 호칭을 혼용했다.] 이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작용한 것으로, 고려군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기는 했지만 침략의 피해자가 아니라 거꾸로 침략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을 [[한국사]] 학습자에게 전달하기에는 심리적 장벽이 생기기 때문이다. 물론, 한국 사학계만 이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자신들이 벌인 전쟁은 '원정', '정복 사업', '영토 확장'으로, 자신들이 당한 전쟁은 '침략', '침공', '○○구(寇; 도적)', '○○의 난(亂)' 등으로 적의를 담아 부른다. ||[[파일:km_014_106_01.gif|width=100%]][br]▲여몽연합군의 1차 원정로[* 기록에 따르면 고려군은 합포에서 출발해 지금의 [[거제대교]]가 있는 견내량과 거제도 서쪽 해안선을 거쳐 남진한 뒤 대마도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, 이를 반영하지 않고 거제도 동쪽 해안으로 이동한 것처럼 그렸다. 당시 고려수군 진영도 거제면에 있었고 이는 [[대한해협]]의 해류로부터 안전하여 고대부터 쓰인 항로다. 2차원정도 그렇고 여말선초 대마도 원정 때도 마찬가지였다.] ||[[파일:km_014_106_02.gif|width=100%]][br]▲여몽연합군의 2차 원정로|| ||[[파일:전근대 한국-일본 간 항로.jpg|width=100%]]|| [[영어]]로는 "Mongol invasions of Japan(몽골의 일본 침공)"이라고 부른다. 이 당시 [[고려]]는 [[일본]]을 공략하기 위한 최일선 교두보였으며, 원나라를 위해 준비해야 했던 막대한 함선 등에서 전쟁의 한 축을 또한 담당했다. 또 1차 원정군과 2차 동로군은 합포([[마산]])에서 출발했다. 그러므로 한국 입장에서는 여몽연합군 혹은 여원연합군이란 표현을 쓸 수 있다.[* 고려를 독립국으로 볼 것이냐에 관하여는 [[여몽관계]] 문서로.] 다만, 숫자와 전력상으로 보았을 때 주체는 [[원나라]]가 맞다. 1차 원정에서 원나라군은 2만 5천, 고려군은 1만 5천[* 전투 병력은 8천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뱃사공이었다.]이었고, 2차 원정에서 강남군[* 원조에 의해 패망한 [[남송]]의 잔여 병력. 1차(1274)와 2차(1281) 그 사이에 남송이 멸망했기(1279) 때문이다.]은 10만 명[* 함선 3,500], 나머지 4만의 동로군은 원나라군 1만[* 몽골인 지휘관 밑에 [[거란]]/[[여진족]]과 [[한족]]으로 구성된 하급 장수와 군졸들이 딸렸다.], 고려군 1만, 고려의 수부 1만 7천[* 함선 900척]이 동원되었다. 한편 1차 원정에서 900척의 전선을 만드는데 4개월 동안 고려인 3만 5천 명이 동원되었다. 사실 이는 고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달가운 전쟁이 아니었다. 가뜩이나 몽골과의 대규모 전쟁으로 전 국토가 피폐해져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며, 농경지나 도시의 복구에 쓰여야 했을 인적, 물적 자원을 전쟁용으로 돌리게 되면서 고려 말기는 더욱 더 피폐해지게 된다. 이 전쟁에서 중요한 변수가 된 [[태풍]]은 후에 [[카미카제]]라는 말이 생긴 원인이 되었다.[* 1차, 2차 전쟁 모두 태풍 때문에 실패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